※ Fate/Stay Night 기반 글입니다
※ 린 루트에서 창병과 궁병이 한바탕 붙은 뒤의 이야기
※ 딱히 BL적 요소는 없을지도?
※ 꽤 오래 전 글입니다. 와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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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트의 기척을 감지하고자 교회 안을 쏘아보는 백발의 사내. 그가 입은 붉은 코트가 밤 공기에 살며시 흔들린다. 그 안으로 슬쩍 보여지는 다부진 몸. 승리를 위해서 라면 어떤 짓이든 한다는 남자가 갖기에는 –랜서가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훌륭한 것으로 여겨졌다.
“…….”
“…….”
무거운 침묵이 좀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우던 남자들 사이에 감돌았다. 원래부터 이 아처 클래스의 녀석은 말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고 -..랄까 입만 열면 비꼬아대니 다물고 있어 주는 것이 이쪽으로선 쓸데없이 부딪히지 않아서 좋다- 랜서도 붙임성은 좋은 편이지만 침묵을 못 견뎌 하는 축도 아니라서 그다지 성격이 맞지않는 녀석과 일부러 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정적이 흐르는 속에 푸른 갑주의 사내는 자연스럽게 아까의 전투를 머리 속에 떠올렸다.
자신의 최대의 비기와 그 공격을 막아내던 궁병. 그가 만들어낸 화려하게 펼쳐진 7장의 붉은 꽃잎의 방벽이 한 장 한 장 허무하게 찢어져 흩날려가던 모습은 덧없어 서글프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창병은 문득 미친 생각을 입밖에 내었다.
“세이버의 마스터도 그런 느낌이었지.”
혼잣말로 할 셈이었으나 아처에게도 들렸던 모양이다. 백발의 사내가 창병을 돌아보는 기척을 감지한다.
“뭐가 말이냐.”
허나 그제야 아처의 존재를 눈치챈 양, 응? 하고 고개를 든 먼 신화 시대의 영웅. 그의 붉은 눈에 얽혀 든 빛은 나른하다 못해 허무했다.
시선이 공중에 부딪힌다. 원래부터 고운 시선을 지닌 남자가 아니지만 한층 굳어있는 회색 눈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랜서를 바라본다. 평소라면 짜증이 먼저 났을 시선이었다. 그러나 회색 눈에 담긴 감정의 조각이 너무나 필사적이라 짜증에 앞서 의구심이 들었다.
“세이버의 마스터, 네가 꺼낸 방패와 닮은 이미지라고 했다.”
“....큭..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네 목 위에 있는 건 장식이냐?”
“…….”
“녀석이 방패라고?”
낮지도 높지도 않은 음성에서 분노를 감지한 것은 창병의 착각일까? 아니, 옛 시대의 영령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상대의 숨길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랜서를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
“녀석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해.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하는 것을 방패라고 할 수 있는가? 혹여 방패라고 해도 그것은 쓸모없는 방패에 불과하다.”
아처는 서번트다.
서번트는 어딘가의 영령이다.
영령이란 놈들은 저마다 성격이 가지각색이고 개중에는 음험하기까지 한 놈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녀석들이라 해도 특정인간에게 –그것도 갑자기 불려 나온 세계의- 원한을 품는 녀석은 없다. 그건 어쩌면 영령이란 것이 완성된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랜서가 아처를 본다.
만난 것은 불과 몇 번, 그것도 사투 뿐. 하지만 그 안에서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랜서에게 아처가 누군가를 증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희한하게 느껴졌다. 그래, 마치..
“설마..너..”
왜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처가 세이버의 마스터를 혐오라 불러도 좋을 만큼 싫어하는 까닭..
“…….”
“그렇군.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냐.”
키득 웃는 것이 어쩐지 유쾌해 보이는 랜서. 그와 달리 창병을 쳐다보는 회색 눈은 굳어 있는 채이다. 아일랜드의 영웅은 곧장 달려오는 살기를 피하는 일 없이 온 몸으로 받아내며 켈켈 대었다.
“그리 살기 세우지 말라구.”
새삼스레 아처와 세이버의 마스터 꼬마와의 인연을 알았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건 그들의 문제이다. 아처의 하얀 눈썹이 꿈틀거렸다. 랜서는 새로운 사실에 대한 이야기보다 아까의 -눈 앞의 존재와의- 대화를 이었다.
“쓸모 없는 창보다는 나으니까.”
“…….”
굳이 창이라 예시를 든 것은 자신을 은연중 지칭한 걸까. 백발의 영령은 상대의 생각을 읽어내려 했지만 느물느물 웃는 창병의 짐승의 붉은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붉은 코트의 영령이 흥..하고 코웃음 쳤다.
“둘 다 쓸모 없다는 점에서 도토리 키재기다.”
“적어도 방패는 주위를 다치게 하지 않지.”
“…….”
궁병은 다시 말을 잃었다. 본디부터 부수기 위해 존재하는 무기는 설령, 그 자체에 결함이 있다해도 공격성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쓸모없는 방패는 그저 본래의 [지킴]이라는 사명을 다하지 못해 대상을 상처 입히게 하고 말아 무력감에 비통해 하지만, 쓸모 없는 창은 지켜야 할 존재마저 스스로의 손으로 상처 입히게 하고 말아 절망한다. 하얀 머리의 청년은 푸른 머리 영령의 전설을 생각해 낸다.
“…후회 하나?”
“아니, 그게 그들의 삶이었고, 이게 내 삶인 거지. 후회는 안 해.”
그렇게 말은 하지만 정말인 걸까. 회색 눈이 의구심을 품는다.
영웅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존재를 죽여야 했던 창과 영웅이었기 때문에 지켜야 할 존재를 지키지 못한 방패.
기묘한 조합이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그렇게까지 –스스로가 생각하는- 잘못을 고치려 하다니 말야.”
“놀리는 건가.”
“설마-.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을 뿐이야. 아아- 이런 때는 서번트인게 안타깝군. 새로이 알게 되는 것이 있어도 일회성이니 말야.”
와하핫!!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사내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다. 그렇게 키득거리던 창병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미친 듯 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 순간 순간 절대 같은 표정을 보이지 않는 녀석이다.
“아차, 알아도 소용없나. 그 시대에 소환될 일 없으니까.”
“의외로군. 네 놈은 방금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바꾸고 싶다는 건가?”
“아니.”
마음 깊숙이부터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아처의 말을 반박했다.
“날뛰는 자신을 보며 웃을 수 있잖아.”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 걸까. 아처가 한 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다. 순간, 교회 안쪽, 린들이 있는 곳에서 마력이 크게 방출되었다. 슬슬 등장할 시간이었다. 붉은 영령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랜서로부터 등을 돌렸다.
“…….”
그의 태도에 한마디쯤 말이 날아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푸른 옷의 기사는 침묵을 지켰다.
탁탁탁-.
멀어져 가는 아처의 뒷모습을 슬끗 쳐다보았다가 전방을 향했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교회의 밤은 인적이 없었다. 붉은 눈이 어둠을 응시했다.
얼굴을 맞대는 족족 말싸움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투를 하고.. 제대로 얘기다운 얘기는 해보지도 못했지만 아처의 성격이 왠지 모르게 읽혀진다. 자신과 다르게 성실한 녀석이다. 잘못된 것이라 여기면 하나하나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녀석. 세상은 결코 곧을 수 없는데 그러기를 동경하며 고쳐나가다 끝내 스스로마저 잘못된 것으로 여기고 파멸시키려 하는 녀석.
“괴물자식.”
비틀어져 있는 곳을 모르고 고치려다 끝내 존재 자체를 없애려는 자와 비틀어져 있는 곳을 알면서도 내버려둬서 더욱 비틀어져 버리는 자.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어느 쪽이든 그릇된 건 아니라구.”
거칠게 마력들이 맞부딪히는 교회의 바깥에서 푸른 갑주의 창병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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